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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트랙백도 거셨고 반론을 해주셨으니 가만히 있는건 예의가 아닌지라.
명량(2)

다시금 몇가지 문제를 지적해드리고자 합니다.

명량 해전에서 이득을 본 것은 누구인가? 라는 부분인데.

조선은 싸움에 이기고 방어선을 좁히고, 그틈에 일본은 전라 우수영을 장악했다고 하셔서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봤는데 

이글루에 고수분들이 많아 이 방면의 자료를 정리해주신 분이 계셔서 그분의 링크를 우선 겁니다.

(골방자취생님에게 허락없이 링크를 건데 대한 사죄와 양질의 자료정리를 남겨주신데 대한 감사를 올립니다.)

명량 해전 이후를 전선기록입니다.

말씀대로 이순신 장군은 병력수습과 재정비를 위해 당사도, 법성포, 위도를 거쳐 고군산도에 도착 이곳에서 장계를 올립니다.

이곳에서 남아있던 병력등을 수습하고 피난민중 지원자를 뽑아 수군으로 편성한후 군량등을 다시 채우고 다시 남하를 시작하는데

10월 9일 전라우수영으로 다시 되돌아옵니다.

....... 명량해전이 9월 16일에 있었고 이순신 장군이 전라우수영에 돌아온것이 10월 9일. 단 20일 만에 장악한 거점을 빼앗기는 일본 수군은 그야말로 킹 오브 호구라는거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일본군은 전라우수영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133척(가장 믿을 만한 숫자, 실은 300척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의 배중 30척이 침몰당하고 상당수의 병력이 박살난 상황에서 명량에서 손실다운 손실 없이 이겨버린 후 다시 전력을 보강할 게 뻔한 조선 수군과 싸우는 것은 그야말로 미친짓이죠. 

물론 일본측 기록에서는 전북 부안까지 왜군이 상륙하는데 성공하지만.. 그 무렵 이미 일본 육군은 경기도 경계선까지 진출한 상황이었습니다. 적어도 최전선까지 진출해서 병력을 보태야 의미가 있던 일본의 수륙병진 작전은 이미 명량해전 하나로 물말아먹었다는 증거고, 기껏 서해안에 진출한 일본군도. 20일도 안되어 서해안에서 내쫓기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실록등에서도 경기도까지 진출해있던 왜군은 9월 21일 철수 했다고 기록이 되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조금만 더 밀면 임진년때처럼 한양 장악도 가능하고 전선유지만 잘해도 하삼도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상황에서 일본육군은 명량이후 대대적인 철수를 시작합니다. 이것이 말해주는건

1. 일본의 수륙병진 작전이 박살났음, 수군 상륙후 육군과 합세해 물자를 보급하고 병력을 더해 방어선을 밀어내거나 수군이 뒤통수, 즉 한양을 직격하는 상황이 나야하는데 이 작전이 실패하고 결국 육지 전선은 고착될 위기에 처함.

2. 보급선 불안. 명량에서 노데미지로 전투를 마친 수군이 흩어진 전선을 모을 시간을 벌고 그를 통해 다시금 제해권 장악후 해상 보급을 끊어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됨. 더더군다나 그를 견재해야 할 일본 수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황. 따라서 전선을 길게 늘린 상황에서 전선유지가 사실상 불가능해짐.

이 두가지 이유입니다. 결과적으로 명량해전 이후 일본군은 해안선을 따라 지은 왜성에 틀어박히게 되었고 이 상황은 정유재란이 끝날때까지 계속됩니다.

즉, 적군이 한양을 목전에 두고 있다가 단 한번의 해전으로 각종 전략적 상황이 바뀌어 경기도까지 진출한 왜군이 해안가 왜성에서 수성전으로 돌아서는 상황을 만들었는데 이게 구국의 전투가 아니면 뭐가 구국의 전투인지 알고 싶을 정도입니다.

일본군이 왜성에 기거하면서 병력과 보급을 받아 전투 지속이 가능했다? 아니요 무리입니다. 조금더 시간이 지나면 명 수군이 조선 수군에 합세해 이미 제해권은 다시 조선측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더이상 제대로된 보급을 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로인해 일본군은 더이상의 전선 확대가 불가능해진 상황이었지요. 이것은 실제 도요토미 사망 전까지 1년동안 전선확대를 시키지 못하고 농성전으로 시간을 보내야 했던 일본군의 상황이 말해줍니다. 공격해 나가야할 침공군이 1년동안 농성전에 몰렸다는 사실 자체 만으로 이미 전쟁의 향방은 조선측의 승리로 명량해전에서 갈음이 났고 일본과 조선, 그리고 명이 다시금 협상을 해야 할 상황에 이른거죠 거기다 이번엔 협상조건도 임진년때보다 훨씬 안좋습니다. 임진년 당시는 한양까지 점령하고 북쪽으로 밀고 올라갔는데 이번엔 하삼도는 커녕 주병력들이 왜성에서 농성을 벌여야 하는 판국이니깐요.

이 명량해전이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의미를 가졌다는건 더욱더 웃긴 이야기입니다. 히데요시의 급사는 정유재란 종결 자체의 결정적 요인이지 명량 해전이 갖는 의미와는 2억 8천광년쯤 떨어져있죠. 명량해전은 일본군 전체가 다시 후퇴하여 전선을 물리고, 그후 전선확대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만든 정유재란에서의 결정적 전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노량해전에서 왜 자꾸 도쿠가와를 붙이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쿠가와의 화평은 정략의 문제이지 전략에서 다뤄질 성질이 아닙니다. 노량해전은 상당수의 적을 토벌한데 있어 이미 전략 목표와 의미를 달성했고 (특히 책임을 묻는다는 문제에서) 그것에 도쿠가와와 화평했다고 전략적 의미가 사라지는것은 아닙니다. 
물론 좀더 깊이 들어가면 당시 세키가하라 서군 소속의 장수들 대부분이 도쿠가와와 적대했고 임란당시, 특히 노량에서 피해를 입은 시마즈의 경우 총동원 병력수와 세력이 밀렸다 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건 너무 깊이 들어간 것이고 이미 역사적 증거로서는 가치가 없으니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by 소울오브로드 | 2014/08/17 14:56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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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해색주 at 2014/08/17 18:17
오호,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잘 써주시다니. 좋은 글 감사 드려요.
Commented by 효우도 at 2014/08/18 06:12
1. 음. 핸섬데빌님이 쓰신글에 의하면 당시 조선과 명은 전쟁으로 인해 재정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지만, 일본은 나라가 초토화된 조선과 달리 본진은 아무런 데미지도 입지 않았고 금광개발이나 대외무역으로 인한 경제적 여건이 있었다고 하시고,
소울님은 농성을 하면서 공격도 못하고 버티고 있었으니 보급도 잘 못받고 있었으니 일본군이 시간을 버는 사이 다시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면 일본군은 보급도 못받고 끝났을 것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문제는 조선과 명측이 얼마나 재정적인 압박을 받았고, 일본군이 명랑해전으로 인해 생긴 보급차질이 얼마나 되냐의 문제인것 같군요.
만약 조선과 명측이 상당한 재정압박을 받아서 명군이 '에이! 돈없으니 그냥 갈련다'라고 할정도나 조선 수군이 굶을 정도가 된다면, 농성하면서 시간끌던 일본군은 공격에 안나서고 긴보급선에서 조금씩 보급받더라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꽉잡고 있는한 결국 예산의 압박으로 명랑해전의 결과로 불리해질 것은 조선이고,
이 경우 핸섬데빌님이 말하신 대로 히데요시가 죽지 않았따면 명랑해전은 단순 시간벌기에 지나지 않게 되고.

반대로 조선과 명이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더라도 조선군이 굶거나 명이 질려서 돌아가기 전에 농성하는 일본군을 굶겨죽일 정도로 보급을 방해할 정도의 재정과 수군이 있었다면 명랑해전으로 유리해질 것은 조선(히데요시가 죽던 말던)

즉, 명랑해전이 (히데요시가 곧 죽을 것을 모르는)그 당시에는 조선에게 있어서 단순히 시간벌기였는가 아니면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게 해준 중요한 전투였는가는, 당시 조선의 재정압박과 일본의 재정여유는 어느정도였는가, 일본의 보급 압박과 조선 수군의 보급차단력은 어느정도였는가 하는문제가 되겠네요.


2. 노량해전에 대해 핸선데빌님은 단순히 전략적인 결과론을 이야기를 하시는것 입니다.

피해를 감수하며 추격섬멸전을 벌여서 일본군을 많이 죽였는데, 정권이 바뀌면서 조선이랑 더이상 싸움도 안해서 전략적인 이득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물론 이는 결과론적인 이야기고, 장수가 무슨 점쟁이도 아닌이상 그런걸 예상할 수도 없으니, 피해를 감수하고도 추격섬멸전을 벌이는건 당시 상황상 당연했다.
라는게 핸섬데빌님의 말 같군요.

그냥 단순히 노량해전에서 조선군이 피해를 감수하며 일본군에 입힌피해가 결과적으로 그후 조선군의 전략적인 이득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라는 것이겠지요.

결과적으로 따지자면 당시 조선군이 추격섬멸전을 벌이지 않았다면 아무런 피해도 없었을테고(예: 이순신이 죽지 않았다.) 어차피 일본의 정권이 바뀌어서 전쟁도 끝났을테니까.

책임을 묻는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원한 문제이지 전략적인 문제가 아니지요.
정말로 전략적인 문제가 되려면 그것이 국익과 이어저야하니까요.
전략적인 문제 까지 이르려면 이후 조선이 일본을 공격해서 조선이 약탈당한 만큼의 보상이라도 받거나 일본이 다시 조선을 공격해야 할것 같군요.
Commented by 소울오브로드 at 2014/08/18 09:45
1. 우선 각국 재정문제인데 우선 명은.. 만력제대 당시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는 동시에 중국 내부에서 난이 두개나 더 일어 났습니다. 이때 쓴돈이 어마어마 한데요... 문제는 이때 쓴돈보다 자기 무덤 짓는데 쓴 돈이 더 많이 들어갔습니다. 문젠 이렇게 하고도 남아서 그 후대 후후대 황제들에 그 남은돈을 썼을정도니 명나라의 재정 자체는 그 당시에는 그다지 문제가 없었다고 보입니다. 조선도 국토가 피폐화 되었지만 정유재란 지나고 광해군 시절에는 경복궁 중건 사업에 손을 대었죠. 더더군다나 전쟁중에는 지나치게 풍족한 명나라에 지원을 받고 있으니 재정적 압박은 크지 않았을 것이라 사료 됩니다. 반대로 일본은 국토는 무사한데 더 큰문제가 있으니 바로 무역입니다. 일본 최대 무역 상대가 바로 명이랑 조선이거든요..... 서양과 무역은 중국과 교역량에 비할때 그야말로 새발의 피. 거기다 일본은 시스템상 나라가 일치 단결해 물자를 만드는게 아니라 각 군대의 물자를 각 군을 이끄는 다이묘들이 대는 식입니다. 실제 임진왜란에 참여한 도요토미파 다이묘 대다수는 물자 소모가 심해 당시 임란에 참여 안해 전력을 온존한 도쿠가와 파에 세력이 밀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거기다 도쿠가와가 전쟁을 그만두고 우리나라에게 숙이고 나온것도 이런 무역 차단의
타격이 컸다고도 하고요.

이런 상황이니 사실상 나라안 사정은 명을 제외하면 거기서 거기고 오히려 명을 등에 업은 조선의 전쟁 지속능력이 길 정도입니다. 거기다 명량이후에는 조선 최대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도로 토해내야 했으니 왜군의 전쟁지속능력은 더욱 떨어지죠

2. 원한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정략의 문제였습니다. 요즘처럼 전쟁재판소도 있는 것도 아니고 훗날 통교해서 책임을 물으려 해도 제대로 될 리가 없는 상황에서 말이죠. 거기다 재침을 막는다 목적으로서의 노량해전은 일종의 예방적 전략입니다.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재침을 막기 위한 전투를 벌여 병세를 꺾고 상대에게 우리가 호구가 아님을 보여준다는 위력시위인 샘이죠. 즉, 도쿠가와 정권이 화평을 선택한 순간 조선측 입장에선 오히려 노량해전이 전략적 의미를 가지게 된겁니다. 상대(속내는 모르지만)가 숙이고 나왔으니깐요. 오히려 도쿠가와가 전쟁을 하겠다고 했다면 오히려 노량해전의미가 반감되었겠지요. 걸출한 명장의 전사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는데 재침을 했으니.
Commented at 2014/08/18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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